<나는 절대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> — 유쾌한 문체로 그려낸 씁쓸한 미래

J (제이)
6 min readJan 17, 2021

최근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이라면 단연코 심너울 작가님의 <나는 절대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>이다. 길고 특이한 제목에 자칫 에세이집으로 착각할 수도 있지만, 이는 6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SF 소설집이다.

2020년 6월 발간, 깔끔한 초록색 표지와 일러스트가 인상적이다

시종일관 웃음이 터져나오는 유쾌한 문체

초문을 여는 두 단편 <초광속 통신의 발명>, <SF 클럽의 우리 부회장님>은 페이지를 넘기는 내내 웃음이 터져나온다.

출근하기도 전에 자동으로 ‘퇴근하고 싶다’가 나오는 대학원생 K씨의 연구를 다룬 <초광속 통신의 발명> , 연구원들이 만든 SF 동아리가 오너 일가 부회장의 눈에 들며 시작된 은밀한 모임 이야기 <SF 클럽의 우리 부회장님> .

심너울 작가님만의 유쾌한 블랙코미디는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빠져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. (+ 직장인과 대학원생은 미래에도 고통받는구나…)

“퇴근하고 싶은 기분이 시간을 초월해 과거로 흘러간다라는 사실을 증명해낸 것이다. 퇴근하고 싶은 사람들의 욕망, 즉 정보가 과거로 흐른다는 것, 바로 초광속 통신의 기본 골자인 ‘Salyojo 프로토콜’의 기본 원리가 발견된 순간이었다” — <초광속 통신의 발명> 中

“나는 외치고 싶었다. 덕질에 생산적인 이유가 어딨어요. 그냥 재밌어서 하는거지! 젠장, 제발 취미에서 생산성 좀 찾지 마. 휴식은 휴식답게 하고 싶어! … 알잖나? 오타쿠는 남들에게 자기 좋아하는 것을 영업할 때 모든 부끄러움과 사회적 맥락에서 초탈할 수도 있다는 것을.” — <SF 클럽의 우리 부회장님> 中

근미래가 보여주는 씁쓸한 사회의 이면

출처 : (왼) pexels / (오) 중앙일보

중년 남성 1인 가구의 ‘중성화 시술’이라는 소재로 젠더 이슈를 비판한 <저 길고양이들과 함께>, 정부의 끝나지 않는 융합인재 양성의 일환 ‘깊은벗 프로젝트’로 섬마을 학교로 파견된 AI 의 이야기<컴퓨터 공학과 교육학의 통섭에 대하여>, 그리고 노년층의 디지털 소외와 세대간 갈등을 씁쓸하게 그려낸 <나는 절대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>까지. 작품은 기술을 촉매로 우리 사회의 무거운 주제를 기발한 관점으로 풀어나간다.

“테니스 동아리 사람들은 웬 머리 벗겨진 아저씨가 들어오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만은 않았다. 외관으로 사람을 평가하면 안 된다지만 사람들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잡은 편견 혹은 경험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었다. 하지만 그가 처음으로 코트에 나왔을 때 여자들은 그의 왼쪽 귀 위쪽이 잘려나가 있다는 것을 보고 안심했다. “ — <저 길고양이들과 함께> 中

“하늘을 쳐다보니 오른쪽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. 나는 열대야로 자글자글 타오르고 있는 보도 위에 주저앉아 내가 바라지도 않았던 노추를 억울한 심정으로 곱씹었다.” — <나는 절대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> 中

무한한 시간의 역설, 그리고 가족의 의미

가장 인상 깊었던 단편 <시간 위에 붙박인 그대에게>는 단 1년의 차이로 운명이 나뉜 자매의 이야기다. 태어나기도 전 ‘불멸 시술’을 받은 ‘나’는 20대에 시간이 멈춘 채 영원한 삶을 살지만, 시술을 받지 못한 언니의 삶은 유한하다. 이 사실을 알게 된 언니는 미친듯이 공부에만 몰두하며, 걱정하는 부모님에게도 ‘다 가족을 위해서 그런 것’이라는 알 수 없는 말만 늘어놓는다. 40년 후, 항공우주공학의 세계적인 석학이 된 언니는 충격적인 발표를 하고, ‘나’는 비로소 언니의 말을 이해한다.

인류의 오랜 꿈, 영생이 실현된다면 우리는 행복할까? ‘나’는 불멸인을 향한 테러로 소중한 친구를 잃고, 부모님의 노화와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. 삶은 느슨해지고, 하루하루 최선을 다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.

그런 ‘나’를 붙잡은 것은 역시 가족이었다. 불멸 시술을 알게 된 그날 이후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던 언니를 원망했지만, 언니가 인생을 바친 연구는 결국 가족과 같은 시간대를 공유하기 위해서였다. 어린 시절 언니와 함께 정착액으로 굳인 그 파스텔화를 보며 다시 만날 미래를 상상하는 ‘나’처럼, 무한한 시간조차도 떨어트릴 수 없는 게 가족인가 싶다.

“물론 못 견딜 만큼 괴로울 때도 있다. 그럴 때, 나는 저 광활한 하늘 너머의 어둠 속에서 둥둥 떠다니고 있을 언니를 떠올린다 .400년과 맞먹는 한 달을 보내고 있을 나의 언니, 사춘기 시절 때부터 도저히 담담히 받아들일 수 없는 세상의 진실에 당당히 맞선 그의 모습을 마음 속에 그린다. 내게는 언니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있으니까. 우리 다시 만나 마침내 서로를 완전히 용서할 그 순간이 올 것을, 나는 믿고 기다린다.” — <시간 위에 붙박인 그대에게>中

밀레니얼 세대의 작가의 소통법

출처 :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

“나는 세계가 하나가 된 시대에 태어난 밀레니얼이다. 코로나는 세계화와 그 공고한 질서에 영원히 남을 깊은 상처를 실시간으로 새기고 있고, 이 모든 것이 끝난 뒤의 세상은 우리 밀레니얼 세대가 알던 세상과 크게 다를 것이다. 이러한 커다란 전환점에 미래를 상상하는 SF를 쓰는 것은 나름대로 큰 모험이다. 어쩌면 벌써 우습게 되어버린 이야기들도 있겠지만, 사람들이 재미있게 즐길 수 있다면 참 고맙겠다.” — 작가의 말 中

최근 한국 SF문학계는 젊은 작가님들의 톡톡 튀는 통찰력이 돋보인다. 김초엽 작가님의 <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>이 다른 존재와 만드는 관계를 따뜻한 시선으로 풀어냈다면, 심너울 작가님의 <나는 절대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>는 익살스러운 풍자로 우리가 애써 외면해온 현대사회의 상처를 지적한다.

이외에도 수많은 매력이 있기에, 아직 SF소설의 매력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꼭 한 번 권하고 싶다.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 작가님이 빨리 다음 작품을 발표해주시길 바라며, 짧은 감상문 끝!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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